[한국의 100년 기업] ①포목상의 꿈 '百年 두산'···"혁신·변화·도전"
[한국의 100년 기업] ①포목상의 꿈 '百年 두산'···"혁신·변화·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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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상점'에서 '중공업 그룹'으로···위기마다 사업재편 '돌파'

한국의 산업화는 1910년 한일병탄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가공산업에서 중국 침략을 위한 군수사업 등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광복 이후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한국의 산업화 진전은 사실상 정지 상태였다. 그러나 폐허가 된 국토에 한국 기업들이 산업화 씨앗을 뿌리며 한강의 기적을 일궈 냈다. 하지만 창업 100년 이상 된 거목과 같은 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 두산(1896년), 동화약품(1897년), 광장(1905년), 성창기업(1916년) 등 4곳뿐이다. 100년 가까이 된 기업도 삼양홀딩스(1924년) 정도다. 그렇다면 100년 기업들의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한국 100년기업의 저력을 살펴본다. [편집자]

[서울파이낸스 윤은식 기자] '변화'와 '도전' 그리고 '혁신'은 100년 기업으로 가는 경쟁력이자 필수 조건이다. 이 요건들은 상수(上壽)를 훌쩍 넘긴 올해 123년을 맞은 두산의 원천이기도 하다. 한국 기네스 협회는 1995년 두산을 한국 최장수 기업으로 인증하기도 했다.

서울 종로 4가 배오개(지금의 광장시장 일대). 이곳은 1896년 매헌(梅軒) 박승직이 두산그룹의 모체인 '박승직 상점'을 열었던 곳이다. 이곳은 포목 업을 주로 하던 상점이다. 박승직 상점은 1925년 '주식회사 박승직 상점'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대한민국 최초 근대 기업으로 면모를 갖춰 나갔다.

1946년 '박승직 상점'은 '두산상회로 이름을 바꾸고 박승직의 아들인 박두병이 사업을 이어받는다. 박승직이 두산의 초석을 놓았다면 연강(蓮崗) 박두병은 지금의 두산그룹을 만든 장본인이다. 소비재 중심의 사업구조였던 두산을 산업자본으로 탈바꿈시킨 게 박두병 초대 회장이다.

서울 종로 4가 배오개(지금의 광장시장 일대) '박승직 상점'.(사진=두산)
서울 종로 4가 배오개(지금의 광장시장 일대) '박승직 상점'.(사진=두산)

박두병 회장은 1953년 두산상회를 두산산업으로 바꾸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1960년 동산토건, 1966년 두산, 1967년 두산기계, 1970년 한국병유리 등을 설립했다. 1966년 합동통신사(연합뉴스의 전신)를 인수해 20년간 운영하기도 했다.

두산은 1990년대 후반까지 오비맥주로 대변되는 소비재 중심의 사업구조를 갖고 있었다. 건설(두산건설)이나 기계(두산기계)를 담당하는 회사도 있었지만, 그 뿌리는 오비맥주다. 두산건설의 전신인 동산토건은 맥주공장 개보수와 상·하수 시설관리를 하던 동양맥주(오비맥주) 영선과(營繕科)가 그 시작이고, 윤한공업사(두산기계)는 제조시설 수리를 맡던 오비맥주 공무과가 독립해 나온 회사다.

두산이 맥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박승직 때로 올라간다. 1930년대 일본 맥주 업계는 거대시장으로 떠오른 만주시장 진출을 위해 한국에 계열사를 만든다. 이때 생긴 맥주회사가 조선맥주(하이트진로)와 소화기린맥주(오비맥주)다. 당시 일본은 식민정책 일환으로 맥주회사 설립 시 한국인 일부를 주주로 참여시켰는데 그 중 한 명이 박승직이다.

일제의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직물 산업이 침체를 격자 박승직은 소화기린맥주 대리점을 만들고 맥주 위탁판매업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 박두병은 정부에 귀속한 소회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이 됐고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34억원을 내고 이 회사를 인수했다.

주력사업이던 오비맥주는 이른바 '낙동강 페놀누출 사고'로 휘청댔다. 1991년에 발생한 '낙동강 페놀누출 사고'는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페놀원액 30톤이 파손된 파이프를 통해 낙동강으로 유입됐고 담당자들이 사고사실을 은폐하는 바람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지만 같은 사건이 한 달 뒤 또 터졌다. 

이 일로 박용곤 회장(박두병 회장의 아들이자 두산그룹 3대 회장)이 사퇴했고 환경처 장차관이 경질됐다. 대구에선 두산 사원 신분을 밝히면 밥도 사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쟁사인 조선맥주(하이트진로)는 1993년 '지하 150m 암반 천연수로 만든 맥주"라며 '하이트(HITE)'를 앞세워 두산의 아킬레스건인 '물 문제'를 건드렸다. 이듬해는 "맥주를 끓여서 드시겠습니까?"라는 자극적인 광고문구도 등장했다. 오비맥주의 시장점유율은 뚝 떨어졌고 그 결과 1995년 그룹 적자규모는 9080억원, 부채비율은 625% 달하는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였다. 창립 100주년을 앞둔 1995년 두산은 강력한 재무구조개선 작업에 들어갔다. 같은 해 말 자체적으로 마련한 구조조정안을 발표하고 한국네슬레, 한국3M, 한국코닥 지분은 물론 오비맥주 영등포 공장을 매각했다. 1997년에는 음료사업을, 1998년에는 주력사업인 오비맥주도 팔았다. 

두산은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을 시작으로 2003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인수하며 국내 대표적인 중공업 그룹으로 전환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담수설비(두산하이드로테크놀러지), 발전소 보일러(두산밥콕), 친환경 엔진(미국 CTI사), 소형 건설장비(밥캣) 등 원천기술을 확보한 해외 기업들도 차례로 인수했다.

사업 포트폴리오를 과감히 바꾼 두산은 2000년 3조4000억원이던 매출이 10년 뒤인 2010년에는 23조원을 기록할 정도로 빠른 성장을 이뤘다. 지난 수년간 경제 위기의 파고를 넘으면서도 지난해 매출 18조1722억원을 기록했다. 

두산은 또다시 체질 변화에 승부수를 띄웠다. 박정원 회장은 최근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른 위기를 친환경 미래사업으로 돌파하겠다는 계획이다. 다음 달 초 (주)두산을 두산솔루스(전지박), 두산퓨얼셀(발전용 연료전지) 3개사로 인적 분할해 신성장 사업 육성에 강공 드라이브를 건다. 박승직 상점 이후 두산의 사업구조는 크게 바뀌었지만, 두산이 국내 최고의 장수기업으로 성장케 한 것은 결국 변화와 혁신이었고 앞으로도 변화와 혁신일 수밖에 없다는 게 두산의 경영철학이자 장수비결의 성장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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