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기억력의 한계
집단적 기억력의 한계
  • 홍승희
  • 승인 2005.09.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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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가 겪은 특별한 경험은 다양한 형태로 후대에 전승된다. 그런데 그 전승되는 집단적 기억이 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기 보다는 실제보다 과장되게 전해지거나 사실을 전혀 다른 결과로 인식하는 일도 흔하다.

일을 겪을 당시에는 매우 혹독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승리와 영광의 역사로 미화되기도 하고 고통이 침소봉대돼 잠재의식에 심각한 공포가 자리잡게도 된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겪은 소외감은 훗날 그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때 무의식적인 소영웅주의로 표출되기도 하고 소외감의 극단까지 자신을 끌고가며 폐쇄적 성격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근래 부시 미국 대통령의 개인적 캐릭터를 두고 한 정신과 의사가 시도한 정신분석의 결과 성공지상주의자인 아버지와 대외적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느라 자식들에게는 엄격하기만 했던 어머니를 둔 어린 부시가 입었을 정신적 상처가 그를 가학적 행동에 무감각하도록 만들었다는 재미있는 진단을 내렸다.

대학 시절에는 신입 후배들에게 낙인을 찍는 의식을 관행적으로 치르는 서클에서 활동하기도 했다는 부시의 개인적 경험을 듣다보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민중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게도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근래의 경기는 최악이라는 말들을 많이 듣는다. 과연 그럴까. 이 집단적 인식은 과연 정확하게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까.

근래 들어 물가상승율은 한자리수에도 높다고 아우성이 나오지만 고도성장기인 70년대의 물가는 한자리수 상승이 실현 불가능해 보일 만큼 성장 속도를 웃도는 고물가 시대가 이어졌고 개개인의 생활은 그에 따라 고통을 겪었다.

실업률 또한 지금보다 결코 낮은 적이 없다. 한달에 한 두 시간만 노동소득을 올려도 취업자로 간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식 발표된 실업률이 6%대를 보였던 시절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에는 실업수당이나 의료보험 같은 사회보장 장치가 전무해 간단한 질병에도 돈이 없어 손을 쓸 수 없는 기층인구가 무수히 많았다.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이라는 비교를 넘어 주당 60~70시간에 이르는 살인적 노동이 흔했던 시절이다. 그 때라고 하루 8시간의 법정 노동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과근무 수당도 없는 잔업에 일일이 따지고 싸우기도 어렵던 시절이었다. 노동자의 권익 요구가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몰리기도 십상이었다.

생활형편은 또 어땠던가. 자동차는 고사하고 자전거 한 대 달리기에도 비좁던 달동네 골목길은 처리되지 못한 하수가 악취를 풍기며 흘러내리고 동네 한 곳에 설치된 공동상수도에서는 물을 받기 위한 긴 물통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수십 가구가 공동 화장실 한 곳으로 몰려 아침이면 부풀어오른 아랫배를 움켜쥐고 길게 줄선 광경이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의 상황을 최악이라고 기억한다. 왜 그럴까. 단순히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과거를 미화하는 집단적 기억의 왜곡 때문인가. 분명 그런 측면도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70년대에는 오래 정체돼 있던 사회가 어찌됐든 고속성장 레일 위에 올라타 있던 시절이라 무언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왕성한 출산력이 정부의 산아제한 시책으로 억제되듯 미래를 향한 과도한 기대를 오히려 다독여야 할 만큼 전반적으로 들 뜬 사회였다. 그래서 희망을 품었던 시절의 추억은 아름답게 미화되어 남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 우리가 더 힘들어 하는 것은 일단 미래의 불확실성이 손에 쥔 작은 떡으로는 안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라 하겠다. 하지만 과거의 고속질주에 갑자기 제동이 걸리며 나타난 일종의 과속 금단현상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마치 고속도로를 제한없이 달리던 운전자가 갑자기 교통체증이 심한 시내 도로에 막 진입했을 때 느끼는 답답함과 비슷한 감정이 우리 사회에 만연돼 매사가 짜증스러운 상태에 놓인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저속성장에 대비해야 한다는 경고는 이미 80년대부터 계속 나왔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귀담아 듣지 않은 사회적 대가를 지금 비싸게 치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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